사랑하는 이유 심리학의 ‘아니마와 아니무스’로 알아보기 알콩달콩 책소개



나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이유

 

융 심리학의 
아니마 아니무스’로 알아보기


융 심리학 입문서 《융의 영혼의 지도》 도서 요약 4편은  왜 사람은 자신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걸까?에 대한 내용을 설명할 수 있는 '아니마와 아니무스'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럼 '아니마 아니무스'의 정의를 우선 살펴본 후 사랑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마음의 성장에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화에선 ‘리비도’, ‘콤플렉스’, ‘자아’에 대해서 다루었는데요. 아래 링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 1화 자아 : http://goo.gl/m3epXv

- 2화 콤플렉스 : http://goo.gl/iZqYVq

- 3화 리비도 : http://goo.gl/zj3Kv4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정의

“페르소나와 그림자를 구분하는 것이 ‘악에 대한 선’의 측면(자아의 음과 양, 긍정과 부정의 측면)이라면, 자아와 아니마/무스의 구분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양극으로 표시된다. 다시 말해 카인과 아벨의 차이가 아니라, 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차이인 것이다.”
p. 185

융의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이론은 남성성과 여성성과 관련하여 많이 언급이 됩니다. 융의 이론은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남녀 차이를 인정하기도 한 것처럼 보이는 데요. 스타인 박사는 융이 양쪽 견해를 조금씩 다 담고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젠더에 대한 부분은 아래에서 좀 더 다루겠습니다.

융은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정신의 원형이라고 보고 있다고 합니다. 정신의 원형이 인간의 문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원형에서 문화가 나온 곳이라는 것이죠. 뒤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정신 밖에서 정신을 이어주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다리 같은 것일 수 있겠네요. 마치 중력처럼 힘을 느낄 수 있지만 볼 수 없는 것처럼요.

흔히 사회적 가면을 페르소나라고 하는데요. 이 페르소나의 위치와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위치를 비교하면 정신세계에서 아나마와 아니무스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좀 더 쉽게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페르소나는 자아의식과 외부세계의 사이에 있는 존재입니다. 비유하면 몸과 외부세계 사이에 있는 피부 같은 것이죠. 아니마, 아니무스는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 사이에서 두 무의식을 이어주는 위치에 있습니다. 자아가 무의식의 심연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죠. 음.. 도식화하면 이런 느낌일까요.

외부세계
-------
(페르소나)
-------
자아의식
-------
개인무의식
-------
(아니마, 아니무스)
-------
집단무의식

어설픈(^^a) 도식에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니마, 아니무스는 무의식에 가장 가깝게 있는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의 문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위의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은 도서요약 1편에서 간단히 설명하긴 했는데요. 개인무의식은 개인이 성장하면서 경험이나 문화적인 요인으로 가지게 되는 무의식이고 집단무의식은 모든 인간이 가지는 공통의 무의식입니다.

아무튼, 페르소나(사회적 가면)가 타인과의 관계에 관여하는 반면,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주체(무의식적인 희미한 일깨움, 감정, 사상, 감각)에 대한 자아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눈물이 나거나, 문득 짜증 나고 불편해지거나 하는 등의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요. 타인 그리고 자신조차도 왜 그런지 파악하기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해관계가 끝나면 돌아서는 것처럼 페르소나에 따른 타인에 대한 태도 변화는 확인하기 쉽지만, 자신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알아보기는 무척이나 어렵다고 합니다. 

그에 대해서 융은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고 하네요.

“어떤 이는 자기 내면의 과정에 의해 어지럽혀지는 것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어떤 이는 그 과정에 완전히 좌우되는 것처럼 보이고 ... 그래서 (내면에 좌우되는 사람은) 약간 불쾌한 느낌에도 알 수 없는 질병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며, 단 한 번의 꿈에도 우울한 예감으로 가득 찬다. ... (내면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어떤 이는 그 과정을 생리학적으로 여기고, 어떤 이는 이웃의 행동 탓으로 여기며, 또 어떤 이는 종교적 계시로 간주해버린다.”

융, ​《전집》 6권, 801항

내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자기 내면, 이를테면 마음이 불편한 일이 있으면 불편함을 지워버리기 위해 남 탓을 해버리거나, 과대하게 포장하는 일이 우리에겐 너무 익숙한 것이죠. 남 탓하고 과대하게 포장하는 등의 말이 많아진다는 것은 어쩌면 사회 구성원들의 마음이 아픈 사회임을 말해지는 증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 아니마, 아니무스의 위치와 역할을 간략히 살펴보았는데요. 좀 더 간단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아니마 : 남성에게 있는 내면적 여성성
아니무스 : 여성에게 있는 내면적 남성성

*​

역할 :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의 세계(무의식)로 나아가 직관적 사고와 감정 등에 적응(또는 무의식이 요구하는 걸 행동) 하도록 함.

*​

아니마의 문제 : 기분이 자주 바뀌는 사람은 아니마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아니마는 감정을 다스리지 않고 공기 중에 퍼지는 가스처럼 감정이 자아의식에 스며드는 기분을 일으키는데요. 흔히 무기력한 감정이 드는 상태를 뜻합니다.

*​

아니무스의 문제 : 무의식, 즉 여성이 감정적 생각에 압도 되면 공격적이 되는 문제가 생긴다고 합니다. 이런 상태의 여성과 함께 있다면 상대방은 여성의 감정적 공격에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보호막을 설치해야 하므로 여성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아니마에 압도된 남성은 위축되고 아니무스에 압도된 여성은 공격적이 된다고 하는데요. 아니마와 아니무스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자아의식이 무의식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말이며, 자신의 정서를 억제할 수 없다는 면에서 발달되지 못한 근육과도 같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아니마와 아니무스

《융의 영혼의 지도》의 저자 스타인 박사는 이런 남녀 차이 때문에 남성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다스리는 데 도움을 줄 여성을 찾고, 여성은 자신의 감정, 즉 영감 어린 생각을 수용하고 함께 일할 수 있는 남성을 찾는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는 아니마, 아니무스의 관계 게임에 참여하는데요. 왜 서로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게임에서 사랑 문제는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선 스타인 박사의 말을 참고하여 보세요.

“왜 현실적 삶은 이와 같지 않은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삶에서 때때로 이러한 조화롭고 균형 잡힌 경험을 한다. 일과 사랑이 제대로 풀리는 시기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런 시기는 갈등으로 점철된 정황 가운데 짧게 존재하는 막간의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주요한 이유는 우리가 균형 있게 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 문화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참된 내면의 성장, 집단문화(페르소나라는 사회적 가면)와 반대되는 ‘개인 문화’라고 일컬은 내면의 성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 우리 대부분은 매우 원시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 페르소나(사회적 가면)가 벗겨져 나가고 아니마, 아니무스가 무의식의 심층을 향해 문을 열어줄 때만, 예를 들어 중년기처럼 자아가 페르소나와 아니마, 아니무스의 갈등으로 찢겨졌을 때(예: 중년기 우울증)에야 비로소 내면의 성장을 심각하게 고려한다. 이것은 마치 신경증이 발생한 듯 보이겠지만, 개인의 성장을 위한 준비 과정일 수도 있다.”

p.194 ~ 195

결국 요약하면 사회에서 자신이 보여지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익숙하고 자신이 자신을 성찰하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아, 내면이 성장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자기 성찰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반려자를 찾았다고 하더라도 사랑에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겠죠.

우리는 인터넷, TV 등을 통해 잘못된 사랑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듣게 됩니다. 그와 같은 현상도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통해 설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사회적인 역할에 충실한, 즉 사회적 가면인 페르소나를 진짜 자신이라고 여기고 있는 남자가 있다면, 그는 규칙에 따라 혹은 조직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면 되니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일이 적습니다. 그래서 감정을 죽이고 사는 남자들은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여성, 즉 사회적 질서에 얽매여 있지 않은 여성에게 눈을 돌리기 쉽다고 하네요. 만약, 평상시에 자기 자신의 내면을 잘 살핀 사람이라면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행복이 하룻밤을 보내는 여성으로부터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잘 알 수 있을 텐데요.

반대로 여성에게도 남자와 같은 환상이 있다고 합니다. 남성이 사회에서의 자기 역할에 충실하다가 감정적인 일탈을 한다면, 여성은 사회에서의 자신의 위치와 역할이 정해지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게 되는 꿈을 가진다고 합니다. 동화를 예로 들면 신데렐라처럼 가난한 여성이 왕족과 만나는 꿈을 가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타인 박사에 따르면 남성이 일탈적인 사랑을 하는 현상과 여성이 사랑을 통해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고자 하는 이런 현상은 모두 같은 욕망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자신이 보살펴주지 못했던 영혼의 초상을 보여주고, 자신의 영혼이 하고 싶었던 모험과 가지고 싶었던 정신을 나타내 주기 때문이라고요.

음... 저는 지금 저 자신을 보살피는 사랑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저의 무의식이 준 저의 욕망이란 가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씌워서 사랑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되네요.


사진. 고전이 된 영화 [펄프 픽션​]의 대표적인 명장면

위에 소개한 사랑을 표현한 이야기가 무엇이 있을까란 생각을 하니 영화 [펄프 픽션]이 생각납니다.

감정 없이 조직의 일을 하는 ​건달 빈센트(존 트라볼타)가 두목의 애인이라는 자리가 있으면서도 현실을 불만족스러워하고 이탈을 꿈꾸는 미아 웰러스(우마 서먼)와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는 위 아니마, 아니무스의 관계 게임에 잘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나온 영화로는 뭐가 있을지 생각해 보니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허Her]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타인을 위한 감동적인 편지를 써주는 것이 직업이지만 자기 감정은 메말라버린 남자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가 항상 감정적(?)으로 자기 걱정을 해주는 인공지능 사만다(스칼렛 요한슨)을 사랑하게 되는 것도 아니마, 아니무스의 관계 게임으로 해석할 수 있어 보이네요.

^^​

 


젠더와 아니마, 아니무스


“융의 이론에서 볼 때, 남녀 모두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각각 갖는다. 하지만 이러한 특질은 성에 따라 다르게 분할된다. 이 차이는 사회적이거나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원형적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차이는 사회 정책의 변화로 쉽게 제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융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본질적, 심리적 차이가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고 하는 현대 여성운동가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 p. 197

글의 시작 부분에 잠깐 나왔던 내용에 대한 추가 설명입니다. 위 인용문으로 젠더와 관련된 아니마와 아니무스에 대한 이야기는 다 한 것 같습니다.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니까요. 무엇이 더 옳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융은 남성도 여성성을 가지고 있고, 여성도 남성성을 가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란 입장이라서 일부 젠더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분들에게는 융의 이론이 반박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하네요.


여러분은 성별이 남녀의 근본적 차이를 만들 수 있다고 보시나요? 
아니면 성별이 아무런 남녀의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고 보시나요?

 


의식의 성장과 아니마, 아니무스

“지나치게 소심하지 않거나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니마, 아니무스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하며 그 일부가 되어 합류하기를 원한다. ... 하지만 본질적 자아의 행위는 아니마, 아니무스에 관여하는 것이지, 무의식이 요구하는 행동에 따르는 것은 아니다. 융은 이 대립을 ‘논쟁’이라고 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무엇을 갈라지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 아니마, 아니무스와 ‘논쟁’을 한다는 것은 무의식적 환상이 만든 허상의 세계를 분쇄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의 정신세계의 심원함을 가장 완전히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의식적 추정은 이미 많이 먹었는데 더 먹으라고 타액을 계속 분하며, 성적 충족이 이미 이뤄졌는데 성적 갈망을 계속 일으키게 한다. 즉 우리로 하여금 자극과 반응이 연속되는 쇠사슬에 묶여 감정적으로 팽창된 행태를 끊임없이 반복하도록 추동한다.”
p. 209-210

잘못된 사랑은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였는데요. 의식의 성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니마, 아니무스를 통해 전달되는 무의식적 욕구의 특징은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것처럼 반복적으로 같은 것을 욕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음식을 먹고 또 먹고,
충분히 가지고 있는데 더 가지려고 하고,
성적 갈망을 계속 갈망하는 것이죠.

어쩌면 우리는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만들어 준 ‘멋진(?) 환상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여기고 집착하며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로 그런 욕망들을 포기한 척하면서 말이에요.

아무튼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우리에게 보여준 환상은 투사를 통해 실현이 되고 이건 평생 지속이 된다고 합니다. 투사는 앞서 사랑 이야기에서 말한 것처럼 남성이 여성을 통해 자신의 감정적 답답함을 풀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대신 표현해주는 혹은 어떤 형태로든 무의식을 건드리는 존재들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로는 ‘영웅’이나 ‘뛰어난 스포츠 선수’에 감정 이입하는 것 정도가 있을까요? 보통 이런 투사는 일상에 활력을 주기도 하지만 앞의 인용문처럼 자극과 반응의 반복이라는 운명의 쇠사슬과도 같습니다.

스타인 박사는 이런 반복을 끊어내고 자신의 무의식에 끌려가며 살지 않으려면, 무의식과 논쟁하면서 자신의 무의식적 욕구를 명확하게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동시에 그런 활동은 의식의 성장을 일으킬 수 있다고도 하고요. 그러나 당연히 욕망을 포기한 척하는 것은 진정한 논쟁의 결과물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자신과 '논쟁'하는 건 분명 의식 성장에 좋은 일이지만,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합니다. 스타인 박사는 오랜 명상 수련 등을 한 분들만 완전히 운명의 쇠사슬을 끊을 수 있다고 하네요. 자기 마음 하나 보살피는 것도 노력 없이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글을 끝내려고 하니 그동안 얼마나 많이 스스로를 위해 논쟁을 하고 있었는지를 물어보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논쟁을 권하는 세상일까하는 질문도 동시에 떠오르고요.

아무쪼록 여러분의 사랑과 욕망과 자기실현에 대한 노력이 무의식의 환상에 이끌려 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앗! 논쟁에 대해서 좀 설명이 부족한 것 같아서요. 스타인 박사는 무의식이 만든 허상의 세계를 분쇄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덧붙이는 말로 본질을 이해하고 계약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논쟁이라는 다툼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을 완전히 이해하고 일종의 합의를 맺는 것이죠. 이런 방법 일상에서 많이 쓰시죠.^^

우리 터놓고 속 시원하게 이야기 해요!라고요.

항상 시원하게  가슴 따뜻하게 이야기할 분들과 함께하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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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인미디어란? 한국뇌과학연구원이 제공하는 뇌활용 미디어 전문섹션입니다. 유엔경제사회이사회(UN-ECOSOC) 유엔협의지위기관인 한국뇌과학연구원은 뇌활용분야의 세계적인 연구기관으로서, 21세기 미래 키워드로 떠오른 인간 뇌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리고자 국내 최초의 뇌과학잡지 <뇌>와 국낸 유일의 뇌활용 매체인 뇌교육전문지 <브레인>의 기사를 온라인 상에서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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